저도 한 때는 열심히 했습니다.

성당을 쉬고 있는 분들을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듣곤합니다.  “저도 한 때는 레지오 열심히 쫓아다니고  단체장도 맡는 등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냉담자가 되었고,  이렇게 냉담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또 쉬고 있는 청년들의 부모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어릴 적에는 복사도 열심히 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면서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성당에 통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들이 왜 쉬는 신자가 됐을까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 얘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하던 교우가 쉬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역설적이게도 열심했던 그 활동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봉사를 할 동안 열성적으로 했지만  그것이 하느님과 교회의 뜻과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의지, 욕망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 나름의 인간적인 수준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처음에는 인간적인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성당 건물이 아름다워서,  차 마시고 쉬는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한국 사람을 만나고,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혹은 청년 시절이라면 예쁜 여학생이나  멋있는 남학생을 만날 수 있어서 등등  극히 사소하고 인간적인 것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게서 너에게로,  인간적인 것에서 하느님께로 옮겨가야 합니다.  이렇게 승화되지 않고 나와 인간적인 상태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의 참맛을 보지 못하면 쉴 수밖에 없습니다.  좋게 느꼈던 공간은 시들해졌고,  예쁜 여학생과 멋있는 남학생은 시간이 지나면 제 갈 길로 흩어져 갑니다.  한국 사람을 만나도 위로받기 보다는 마음만 불편해지고,  한국음식을 먹는 것도 그저 그렇게 식상해집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재미없어 집니다.  한 주일 두 주일 빠져도 연락하는 사람도 없고,  크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니 계속 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점이 인간적인 동기였더라도  점점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노력하도록 성장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에서 출발해서  인간적인 것으로 마무리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펼쳐진 것입니다.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전임 신부님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젊은(혹은 나이든) 신부님이 내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열심히 하는 나를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조건이 충족되면 누구라도 쉬는 교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인간적인 자신의 필요와 욕구만을 앞세웁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상황에서든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으로 설 수 있습니다.  나의 욕망과 체면, 설자리가 우선이 아니라  하느님과 공동체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성숙한 신앙인이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이유, 내 신앙의 이유는  나를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과 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성사생활, 공동체)를 통한 건전한 하느님과의 만남(체험)이  나를 건강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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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1. Youngmin says:

    성당에 다시 돌아온지 3년반이 되었읍니다. 제 필요때문에 다시 성당에 다니기 사작했는데 2010년 성령강림 축일에 하느님을 체험한 후 성령강림 축일에 제가 받은 은혜는 두려워함이었읍니다. 하느님께 마땅한 존경과 사랑을 드리지 못할까 두려워하게 해주는 은혜입니다.

    이 글은 제에게 하느님이 중심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읍니다. 일년 동안 성령의 은혜를 가슴에 새기며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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