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앞에서

몇해 전 부모님을 모시고 프랑스 루르드에 간적이 있습니다.

시간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성가 “아베마리아”,

성모상 앞에 초를 봉헌하고 기도하던 많은 사람들,

아픔을 겨우 겨우 참아내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환자들,

그 모든 사람들의 고통과 번민, 슬픔과 눈물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굽어보시던 성모님의 모습.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항상 의문이 떠오릅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

어찌 이리도 무시무시한 병고를 사람에게 주시는 걸까?”하는 물음입니다.

짧은 세상 안 아프고 살다가 고이 떠나면 좋을텐데,

몹쓸 병에 걸려 투병생활 하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다가

처참한 모습으로 이승을 떠나가는 것을 보노라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 투병 중인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워 할 말을 잊습니다.

제가 입원하고 있던 암병동에도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몹쓸 병에 걸린 아이들 역시

건강한 아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 역시 만화책을 보면서 웃고, 장난도 잘 치고,

유행가도 곧잘 부르면도 재미난 춤도 추곤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잠시 죽음과 직면해서 싸워야 하는

아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불과 몇일 전까지만 해도 어디가 아프냐는 듯]

병실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헤헤거리던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충격이 더욱 큽니다.

 

어제도 한 아이의 죽음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해전부터 암으로 투병을 하였는데,

한동안 괜찮아 지는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달 전 중환자실에 입원한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온 몸에 주사바늘을 꼿고,

자가호흡을 못해 호흡기를 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화장을 하여 장례를 치루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당하는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아니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고통, 특히 내 탓없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은

하느님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숙제와도 같은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기억할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는 고통을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고린후 4,16-18)

 

우리가 마음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토록 피하고 싶은

모욕이나 병고, 죽음까지도 이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 앞에 설 때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나는 고통을 당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나는 모욕을 당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나는 죽음 앞에서 무엇을 먼저 생각하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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