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섭 안드레아 신부님 장례미사 강론

 

[쉐마] “신종섭 안드레아 신부 장례미사 강론”

 

저는 신종섭 안드레아 신부의 동창 이수한 시릴로 신부입니다. 제가 신종섭 안드레아 신부를 처음 만난 것은 소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주교님을 면담하는 자리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다음날이었으니 1979년 10월 27일이었을 것입니다. 신부가 되겠다는 부푼 꾼을 안고 여덟 명이 떨리는 마음으로 지금은 추기경이 되신 정진석 니꼴라오 주교님을 만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삼십 사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넘어버렸고, 이제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안드레아 신부를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신학교 시절 우리 신종섭 안드레아 신부는 아주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농구, 탁구, 마라톤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음악에 대한 조예 뿐 아니라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었습니다. 그 실력을 사목에 접목해서 감곡 매괴성당에서 음악피정을 하면서 수먾은 사람에게 영적 감화를 준 사실은 여러 신자 분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동창 신부들이 모이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곤 했는데, 저는 우리 안드레아 신부가 즐겨 부르던 ‘바윗돌’이라는 노래를 청해 듣곤 했었습니다.

“찬비를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 하얀 눈 맞으며 아픈 맘 달래는 바윗돌, 세상만사 야속타고 주저앉아 있을 소냐, 어이타고 이내 청춘 세월 속에 묻힐 소냐,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한 맺힌 내 가슴부서지고 부서져도 굴러 굴러 굴러라 바윗돌, 저 하늘 끝에서 이 세상 웃어보자…” 여기서 바윗돌은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했는데, 이제 남은 우리가 친구 종섭이의 묘비를 보며 이 노래를 부르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옵니다.

우리가 다녔던 대구 남산동에 있는 대신학교에는 교정 주변에 성직자 묘역이 있었습니다. 함께 산책을 하며 묵주기도를 바치다가 무심코 묘비를 보았는데 나란히 신부가 되고 1년, 2년, 3년만에 돌아기신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문득 ‘아니 이렇게 데려 가시려고 그 오랜 시간을 신학교에서 고생을 시키셨나?’하는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몇 날 며칠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예수님의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30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공생활까지 겨우 33년, 공생활을 사제의 삶이라 생각하면 겨우 3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요 참 스승이십니다. 또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생각이 납니다. 사제 생활 1년 남짓 그래도 그분은 우리 사제들의 수호성인 이십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도 생각 납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4년의 사목생활, 그럼에도 엄청난 업적을 이루신 신부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사제들의 모범이십니다.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종섭아! 그래도 우리는 그분들 보다 더 오래 살았고 더 오래 사제 생활을 했구나. 이제 며칠 후 6월 29일이면 우리가 신부된지 21년이 되잖아. 우리가 소신학교에 입학하던 때가 1980년이니, 부르심에 응답한 세월이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생애와 같은 33년이구나. 그래 정말 오래 살았고 오래 사제 생활을 했구나. 그런데도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너를 입관하던 날, 가족들이 울며 너의 귀에 대고 속삭이던 말이 생생하구나. ‘그동안 너무나 외로웠지! 미안해, 누나가 미안해. 이제 외롭지 않고 아프지 않은 곳에 가서 편히 쉬어. 사랑하는 내 동생아!’

그래, 종섭아! 우리도 그래서 미안해. 외롭고 힘들 때 함께 해 주지 못해 미안해. 우리 동창들이 늘 네 편에 서 있지 못해 미안해. 네 곁에 머물러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래도 종섭아, 이건 너무한 것 아니니? 내가 너보다 네 살을 더 먹었는데 수한아, 수한아 이름을 불렀지? 살아생전에도 맞먹더니 기어이 하느님 나라에서 내 형이 되고 싶어 그렇게 급하게 떠났니? 그래, 그곳에서 아프지 말고 힘들어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우리도 곧 따라갈게. 네가 못다 이룬 사제직은 우리가 더 열심히 살아 갚아 나갈게. 이 세상에서는 내가 먼저 태어났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네가 먼저 입성했으니 다시 만나면 내가 형이라고 불러줄게.

미인은 박명이라는 말은 들어 보았는데 신부는 뭐가 박명인지 강론을 준비하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다재다능한 것이 박명은 아닌지? 다재다능함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신부의 마음이 박명의 전제 조건은 아니지 나름 정의를 내려봅니다.

6월은 예수성심성월입니다. 예수성심 대축일 곧 사제성화의 날이 있고, 성모성심 대축일이 있습니다. 사제의 맘은 예수의 맘이라는 성가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제,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은 내어주는 성모님을 닮은 사제가 신종섭 안드레아 신부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의사인 것을 빼고는 음악적 재능이나, 오지에서의 현지인 사목이나, 하느님 곁으로 떠난 나이 마흔 아홉이나 모두 이태석 신부님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특히 아버님 어머님을 비롯한 유가족 여러분, 이제 이처럼 아름답게 살다 간 신종섭 안드레아 신부를 하느님 자비에 맡겨 드립시다. 종섭아! 네가 좋아하던 바윗돌 가서처럼 한 맺힌 네 가슴 모두 굴려버리고 저 하늘 끝 하느님 나라에서 이 세상 향해 한 번 웃어보렴. 잘라라! 우리의 벗 신종섭 안드레아 신부…

 

– 청주교구 이수한 시릴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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