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수호

선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1760∼1801)

정약종 성현은, 조선 왕조 후기에 속하는 시대인, 1760년에,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 광주군 마재(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마재)에서, 진주목사였던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갑술옥 사건(1694)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떠나기 시작한 양반 계층인 남인의 계보 속에서 성장하였다. 남인파의 실권은 정약종 성현과 형제들로 하여금 학구생활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가정은 당대로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성현의 형인 정약전 선생 (1758-1816)과, 동생인 정약용 선생(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들이었다. 특히 정약용 선생은 학문 연구 생활 중에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입교하여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한국 지성사에 있어서 손꼽히는 인물로서, 다방면으로 자신의 많은 저서들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을 내놓아,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정약종 성현은 강직한 성품과 함께, 뛰어난 통찰력과 꾸준한 탐구력을 지닌 청소년으로서, 시문과 경서에 능통하여 당시의 양반 자제들처럼 과거에 응시,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고 학문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우선, 성현은 유교 철학의 주자학과 노장(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주자학이 지나치게 공리공론에 치우쳤고, 도가가 허무맹랑한 사상임을 깨닫고 반발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조선 왕조에는 학자들이, 부연사들을 통해서 17세기부터 서양문물과 함께 도입된 한역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인척 관계를 맺고 있던 남인계통의 신진학자들은 ‘천진암’이라는 절에 모여, 그들이 탐구한 ‘천주학'(천주교 교리)의 새롭고도 이질적 종교 사상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전개하면서, ‘천주학’이라는 학문을 수용하여 ‘천주교’라는 종교로서 그 신앙을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19세의 정약종 선생도 위에서 언급한 그의 두 형제들과 함께 ‘강학회’라고 불리우는 이 모임에 참여하여, 교리연구와 함께 녹암 권철신 성현이 정한 규칙적 기도와 묵상의 공동생활에 참가하였다.

정약종 성현은 매우 신중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 베드로 성현이 강학회 회원들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에, 입교를 서둘지 않았다. 그는 좀 더 많은 교리서들을 탐독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 후에, 1786년에 이르러서야 세례를 받았고, 영세 때에, 자신의 입교에 있어 망설이던 태도가 성 아우구스띠노(354-430)의 회심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 위대한 성인을 영세 주보로 모셨다.

정약종 아우구스띠노 성현은 입교한 후로는, 경건한 종교인으로서 독실하게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 때에, 많은 친지들이 교회를 떠나고, 가족들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종 성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천주교를 헐뜯고 신봉을 엄금하였지만, 성현은 이러한 문중 박해를 항구한 인내심을 갖고 참아 받으면서, 어버이를 공경하는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여 실천한 동시에, 신앙인의 본분도 충실하게 완수하였다. 더 나아가서 자녀들에게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을 심어주어, 훗날에 두 아들은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정약종 성현은 항상 많은 교회서적들을 정독하면서, 진지하게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 전념하였다. 당시에 성현과 절친한 사이였던 황사영 선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 아우구스띠노는 무엇에나 자상하고 세밀하였다. 그는 여러 해를 두고 깊이 학문을 연구한 것이 아주 습관과 성품이 되어 버렸다. 조그마한 교리 한가지라도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에는, 침식을 잊고 전심전력하여 그것을 생각함으로 반드시 확실하게 깨닫고야 말았다.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있거나, 언제나 묵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혹시 자기가 통달하지 못하였던 어떤 어려운 점을 누가 풀어주면, 마음에 기쁨이 넘쳐흘러 그에게 뜨겁게 감사하였다.” 또한 정약종 성현은 자신의 해박한 교리 지식을 갖고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격려하면서 돌보아 주었다. 성현께서는 세속사정을 말하는데에는 어둡고 서툴렀으나, 종교적 진리를 연구하여 강론하기를 즐거워하였다. 황사영의 증언에 의하면, “그치고 타일러서, 혀가 굳고 아프게까지 되어도, 조금도 싫증내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우둔한 사람이라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정 아우구스띠노는 교우들을 만나면, 관례적인 안부 인사를 나눈 후에, 곧 교리 이야기를 하여, 하루종일 다른 사람들은 쓸데없는 말을 끼울 수 없었다. 냉담자나 우둔한 사람이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어떠한 종교 문제들을 질문하여도, 마치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이 줄줄 풀려 나와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아무리 연거푸 어려운 문제를 가려 내게 하여도, 조금도 막히는 일이 없었다.” 성현의 논리는 질서정연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였고,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마음을 왕성케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범위한 교리 지식과 함께, 교리 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성을 지닌 정약종 성현은, 일반 대중을 위한 두 가지 교리서들을 저술하기로 결심하였다. 첫째, 교리서는, 두 권으로 된 「주요교지」로서 이는 한국인이 처음으로 쓴 기초 신학서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는 여러 가지 한역 교리서들을 참고하고 인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였다. 그리고 「주요교지」는 종교 진리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순수한 한글로서 아주 쉽고 분명하게 해설하여, 무식한 부녀자나 어린이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이다. 더욱이, 정약종 성현은 독자들이 생소하고 이질적 문화 요소인 천주교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당시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교리를 설명하였다. 「주요교지」의 내용은 10장 43개의 항목으로 기본적 교리를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천주존재의 증명, 천주의 속성, 도교와 불교에 대한 비판, 상선벌악 및 천당과 지옥에 대한 실재, 천지 창조, 천주의 강생과 구속, 예수의 부활과 승천, 원조의 범죄, 영혼의 불멸성, 천주교회 등이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정약종 성현이 사회 신분상으로, 양반 특수 계층에 속하는 학자로서 학문에 능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글로 저술한 것은, 그 자신은 당시에 자부심을 갖고 한문을 사용하던 지식층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인간의 평등사상을 터득하고 실천한, 참다운 그리스도교인임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교리서는, 미완성 작품으로서 「성교 전서」이다.

정약종 성현은 천주교의 광범위하고도 방대한 내용의 교리들을 종합하여, 순서있게, 체계적으로 해설하여,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저술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저서는 ‘신유대박해’ (1801) 때문에 “절반도 채 초잡지 못하고, 중단되어 그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 동안에, 정약종 성현은 사교를 믿는다고 해서, 주위의 비난을 받았다. 1799년 5월 24일(음력)에, 대사간 신헌조가 정약종 성현이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는 상소를 임금께 올렸다. 그러나, 정약종 성현은 1800년 5월에 그의 동네인 양근에서 박해가 일어나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이사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성현은 1795년에 한국에 온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와 자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었고, 자기 집에 여러번 모시기도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정약종 성현의 출중한 교리 지식과 그의 저서인 「주요교지」를 격찬하면서, 이 저서를 신자 교육을 위한 표준 교리서로 승인하여 사용하도록 조처하였을 뿐 아니라, 성현의 교육에 대한 열성에 탄복하여, 교리 강습회인 ‘명도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1800년 6월 28일(음력)에,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계조모인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자기 가정의 정적에 대한 보복으로 11월(음력)에 이르러, 천주교 신자들을 단속하고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교회 박해의 분위기가 점차로 고조되자, 정약종 성현은 이미 자신이 천주교의 대표적 인물로 지적되었기 때문에 도저히 박해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귀중한 성물과 교리서,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을 상자에 넣어 다른 교우 집에 맡겨 두었다. 그러나, 1801년 1월 10일(음력)에 김대비가 국왕의 이름으로,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로 정죄하여, 엄금하는 윤음을 발표하였다. 그래서, 1월19일(음력)에 상자를 보관하고 있던 집도 위험하여, 집주인은 다시 다른 집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래서 임대인(토마스)이 나무 장사로 가장하여, 상자를 솔잎으로 덮어 짊어지고 거리에 나왔다. 그러나 순시하던 포졸이 짐모양이 이상하여 국가에서 금지하는 밀도살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임대인을 관청으로 연행하여 상자를 열어보니, 천주교에 관계되는 서적과 물건임을 발견하고, 이를 운반자와 함께 포도청에 압송하였다.

포도대장은 상자의 주인이 정약종 성현임을 확인하고, 우선 물건들을 압류하는 동시에, 임대인을 구속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에 어느 친구가 정약종 성현을 방문해서, 그의 옷에서 무수한 십자가가 밝게 빛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성현은 대답을 회피하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것이 정약종 성현이 곧 고통을 받으리라는 전조라고 예측하였는데, 이는 들어맞았다고 한다.

1801년 2월 11일(음력) 아침에, 정약종 성현은 고향 마재에 들렀다가, 말을 타고 한양으로 오는 도중에, 금부 도사가 마주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신을 체포하러 가는 것이라 추측하고, 하인을 보내어 자기를 잡으러 가는 것이 확실하면 되돌아오라고 알렸다. 성현의 추측은 들어맞았다. 정약종 성현은 곧장 관가로 압송되었다. 그는 심문관 앞에서 압수된 상자가 자기의 것임을 자백하였으나, 주문모 신부에 대한 질문에는 침묵을 지켰다. 이때에, 성현께서 정부당국에 협조하고 배교하였다면, 자기의 목숨은 몰론 그의 가정의 비참한 운명을 구할 수 있었다. 특히, 정약종 성현은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재산이 몰수되고, 가족들은 친척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아, 비참한 생활을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자기의 신앙이 진실됨을 밝히고 오히려 교리를 설명하면서, 천주교를 변호하고 정부의 금교 정책이 부당하다고 용감하게 선언하였다. 이러한 호교적 자세는 왕명에 도전하는 불경죄로 단죄되었다. 또한, 정약종 성현은 압수된 그의 일기 속에서, 세상, 마귀, 육신은 천주교 신자들이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해서 항상 대적해야 하는 세가지 원수라고 하는 교리내용을 적었는데, 여기서, 세상이라는 표현이 정부를 지칭하는 말마디로 간주되어 국가 전복의 모반죄로 정죄되었다. 따라서 2월 25일(음력)에, 정약종 성현은 이상의 두 가지 대역부도의 죄로 기소되어, 참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정약종 성현이 최필공(토마스)과 함께 감옥에서 나와 함거에 올라 형장으로 갈 때에, 성현의 얼굴은 매우 빛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현께서는 죽는 순간까지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였다. 도중에 함거를 끄는 사람에게, “목마르다”하고 외쳤을 때에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힐책하자, “내가 물을 청하는 것은 나의 위대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정약종 성현은 큰 소리로 주위의 사람에게 말하기를, “당신네는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이요. 대심판 때에 우리의 슬픈 울음은 진정한 낙으로 변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형장에 도착 후에도, 정약종 성현은 형구 앞에 앉아, 아무런 두려움의 표정이 없이, 행복한 기색으로 형구를 들여다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흠숭하올 천지만물의 대주재이신 분이 당신들을 창조하셨으니, 모두 회개하여 당신들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하오. 그 근본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거리가 될 것입니다.” “당신네는 두려워 마시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당신네는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아 행하시오.” 형리는 정약종 성현의 말을 가로막고, 나무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였다. 이 신앙의 증거자는 눈을 뜨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여,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사형 집행인은 겁을 먹고, 자신이 없이 칼을 내리쳐서, 목이 절반 밖에 끊어지지 않자, 정약종 성현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보라는 듯이 손을 벌려 십자 성호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처음 자세로 되돌아가 마지막 칼을 받아, 2월 26일(음력)에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정약종 성현의 나이는 41세였다.

원문출처: 천진암 성지 웹사이트

2014년 8월 16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윤지충 바오로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품위에 올려주셨습니다. 그 때 그 감동이 아직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30년 전 103분의 성인을 주신 데 이어 이번에 124분의 복자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의 아버지가 누굽니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입니다. 124위 복자 중에 대표적인 평신도 중에 한 분으로서 정약용 선생의 둘째 형입니다. 그는 주문모 신부님이 만든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을 맡았고, 쉬운 한글로 ‘주교요지’라는 교리서를 만들어서 신자들에게 보급을 하였습니다. 이분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를 하였는데, 부인 성 유조이 체칠리아와 아들 성 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딸 정정혜 엘리사벳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를 하였으니 아버지가 이들보다 28년이나 먼저 순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이제야 복자가 되신 것입니다. 124위 복자들의 시성을 위해 다시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원문출처: 천주교대구대교구 웹사이트